대통령의 말
대통령의 말 어제(6월 8일)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했다.이재명 대통령 목소리를 들으며 “참, 말 많다”라는 생각을 했다. 역대 대통령 중 말이 가장 많은 지는 모르겠지만, 육성을 가장 자주 들었다는 의미다. 이 대통령은 본인을 ‘드러내는’ 스타일이다. 국민들과 직접 소통하고 여과 없이 이를 방송으로 내보낸다. 국무회의는 현 정부 들어 안건 심의를 제외한 전 과정이 생중계된다. 정부기관 업무보고와 청와대 브리핑도 생중계로 전환됐다.SNS를 통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적극 피력한다. 취임 후 지난 달 28일까지, 이 대통령의 엑스(X·옛 트위터) 게시글은 644건(하루 평균 약 1.8건)에 달한다. 부동산 정책, 스타벅스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 조롱 의혹, 삼성전자 파업 위기에 대한 의견 등 내용도 다양하다. 이런 스타일엔 장단점이 분명하다.국민과 직접 대화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속이 시원하고, 즉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기를 얻는 데도 유용하다. '뉴이재명' 현상으로 불리는 지지층 확장을 이끌어 낸 요인이기도 했다. '국민주권정부'에 걸맞은 공개 행정으로,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각 부서 장관 등 실무자들은 소외되고, 대통령이 먼저 던지면 실무자들이 뒷처리해야 하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또한 시스템이 아닌 대통령 개인기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고 있으며, 대통령은 자신이 한 번 뱉은 말에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이 대통령은 지난 1월 ‘망국적 부동산 정상화는 5천피 달성이나 계곡 정비보다 훨씬 쉽고 더 중요한 일이’라고 했고,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고도 했다.하지만 불과 6개월 지난 지금 부동산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서민의 대표적 주거 형태인 전세는 씨가 말라, 수 억 원이나 올라버렸다. 전세 사는 사람들은 무리하게 영끌해서 집을 사거나, 월세로 전환하거나, 서울 밖 전세로 밀려나는 수밖에 없다. 전세가 월세로 밀려나니, 월세도 매물이 줄거나 세가 부쩍 올랐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지난 26일 열린 비공개 국무회의 자리에서 "최근 집값이 다시 오른다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냐"고 말했다고 한다. 본인이 먼저 나서서 떠들며 장담해 놓고, 마치 실무자들 책임인 냥 왜 물어보나? 심지어 8일 기자회견에선 최근 '전세난'에 대한 질문에 "전세는 특이하게 대한민국에만 있는 일종의 사금융인데 지금 사라져가는 추세"라며 "정상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전세 물량이 줄어든 것은 당연하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지방선거 특히 서울시장 선거 결과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조차도 우리 국민이 저에게, 또는 이 정권에 주는 경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동산 정책에 대한 발언을 보면, 선거 결과에 대해 말로는 ‘경고’라고는 하면서도 실제 마음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가 ‘부동산 민심의 메시지’라는 걸, 이 대통령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전 정부 시절엔 반대였다. 당시에도 부동산 때문에 아주 시끄러웠지만, 부동산 정책을 담당했던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정책을 내며 기자 앞에 섰고, 문 대통령은 지원만 했다. 지금 이 대통령은 본인이 먼저 설레발 놓고, 실무자들은 그 말이 맞든 아니든 뒷수습하기 바쁘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번 말을 하면, 다음엔 그 말을 바꾸기 어렵다. 즉 틀린 한번 말을 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앞으로 4년 남았다. 지금의 스타일을 고수할텐데, 걱정된다.
학교에 보내는 이유
학교에 보내는 이유 필자가 중고교 시절, 체육 선생님들은 참 편했다. 축구공 하나 던져주면 끝이었다. 학생들끼리 알아서 축구를 하든, 아무 것도 안 하든 각자 마음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학부모들이 ‘축구는 위험하니 하지 말아달라’는 식의 요구를 해와서, 축구도 못 한단다. 애들 다치면 학부모들이 학교와 교사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운동회도 안 한단다. 필자 학창 시절 수학여행이 추억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론 고생길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청량리역에 모여 열 몇 시간 동안 완행열차를 타고 경주로 향했다. 숙소에서 주는 새벽밥은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 모른다. 비용이 저렴하긴 했지만, 해도 너무 심했다. 하지만 요즘은 수학여행의 격이 다르다.2~4명끼리 호텔에서 자고 식사도 좋고, 특히 안전요원을 여럿 배치해야 한다. 당연히 비용이 올라간다. 여행으로서 격이 올라가고 추억이 된다.그런데 최근 강원도 어떤 학교에서 2박3일 수학여행비가 60만원이라는 게 문제가 되었다. 너무 비싸다는 거였다. 결국 취소되었다.결국 이 학부모 한 명 때문에 다른 학생들의 추억을 앗아가게 되었다. 이런 부모들은 야외학습 즉 수학여행이나 소풍에 가서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학교나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단다. 그래서 이젠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아예 안 가는 학교가 많다. 이렇게 진상을 떠는 일부 학부모들 때문에, 정작 애꿎은 다른 학생들만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러면 이런 학부모들에게 소풍도 수학여행도 운동회도 축구도 못 하게 하면서, 학교에 아이들을 왜 보낼까? 그들에겐 단순히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해서’라고 생각한다.즉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검정고시를 하면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다. 학교는 단순히 교과과목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우고, 규율에 따르는 법을 배우고, 교사에게 복종하는 법도 배우고, 싫은 것을 하거나 먹기도 하는 등, 사회화 과정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일부 부모들의 경우 학교와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상전 모시듯 하기를 원한다. 아들이 군대에 가면, 훈련 시키지 말라고 민원을 넣는 부모들이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자식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100% 부모가 잘 못 키운 덕이다. 이런 부모들은 차라리 홈스쿨링을 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참교육‘때문에 <참교육>한다?
’참교육‘때문에 <참교육>한다? 넷플릭스에서 2026년 6월 5일 공개된 드라마 <참교육>이 큰 인기다. 플릭스패트롤(Flixpatrol)이 공개한 6월 10일 자 순위에서 <참교육>은 넷플릭스의 글로벌 드라마 부문 전체 2위(비영어부문 1위)에 올랐다. 국가별로 볼 때도 프랑스에서 3위, 독일에서 4위, 미국과 영국에선 7위로 상당히 높다. 심지어 글로벌 비즈니스 미디어인 ‘포브스’는 ‘이 드라마는 올해의 최고작이 될 수도 있다’는 리뷰를 게재할 정도다. 어느 정도 ‘예견된(?) 글로벌 인기’라는 평가도 있다.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된 동명의 웹툰 《참교육》(글 채용택 / 그림 한가람)을 원작으로, 월요 조회수 1위를 달릴 만큼 초인기작이었다. 나아가 해외에 수출되었을 때 (해외 연재명: Get Schooled) 글로벌 플랫폼(네이버웹툰 영어권, 프랑스어권 등)에서 단숨에 상위권에 오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참교육>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교권이 무너지고 학생들의 폭력이 일상이 된 한국의 교육 현실을 폭력을 불사하고 ‘참교육’ 한다는 내용이다. 폭력 학생은 물론 학교 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외면하는 교사들, 자식 편만 드는 학부모들까지 ‘참교육’한다. 학교폭력, 교사 따돌림은 물론이고 촉법소년 법망 악용, 사학비리, 다문화 가정 차별, 가출 팸 범죄, 아동학대 등 다양한 소재를 사이다 같이 시원한 액션으로 해결한다.“과거 폭력 교사와 뭐가 다르냐?”라는 비판이 있지만, 과거 교사들은 ‘촌지 안 줘서’, ‘시험 점수 낮아서’, ‘그냥 심심해서’, ‘가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학생들을 때렸다. 폭력의 이유가 드라마와는 전혀 다르다.또한 “폭력을 정당화해도 되는가”부터 “무슨 감독관이 ‘일당백’의 싸움꾼이냐” 하는 논란은 있지만, <더 글러리>처럼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면 된다. 원작이 웹툰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드라마 <참교육>에 딴지를 거는 집단이 있다.바로 원조 ’참교육‘ 전교조가 "인권 침해와 폭력 행위를 '참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왜곡하지 말라"며 드라마 제작 및 방영 중단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좀 황당해진다. 전교조는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출범했고,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교원노조법'이 제정되면서 합법 노조가 되었다. 이 전교조의 핵심 이념이 바로 '참교육'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교직원조합(일교조)과 진보적 학자들을 중심으로 교육 개혁 운동을 펼쳤을 때의 핵심 표현인 '마코토노 교이쿠(まことの教育)', 즉 '진정한 교육'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지만...)전교조는 '인간화 교육'의 일환으로 체벌과 촌지 금지 그리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 ’학생 인권‘만 지나치게 앞세우다 보니 ’교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오죽하면 교사들이 자살을 하고, 학생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며, 학교와 학부모들의 짓눌림에 교단을 떠나기도 했다. 학생들을 ’참교육‘ 시키겠다 시작했다가, 점점 이상해진 ’참교육‘ 때문에 망가진 학교를 ’참교육‘하는 드라마 <참교육>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다른 선진국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미국은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과 소송이 가장 일상화된 나라 중 하나라고 한다. 게다가 총기 사건이나 학생들의 교사 폭행 등 물리적 위험까지 더해져, 현재 미국은 사상 최악의 교사 구인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영국 또한 학생들의 불손한 태도와 언어폭력, 그리고 이를 제지할 수 없는 제도적 무력감 때문에 신임 교사 3명 중 1명이 5년 이내에 교직을 떠날 정도라고 한다.일본은 1990년대부터 이미 '학급붕괴'와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몬스터 페어런트(괴물 학부모)'라는 단어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드라마 <참교육>처럼, 학교 교육이 정상화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금과 청은 누구의 역사인가?
금과 청은 누구의 역사인가? 얼마 전에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 출신’이라는 얘길 들었다.신라가 망할 즈음에 신라인(마의태자 또는 왕실 주요 인사라는 설도 있다)들이 만주로 건너가 여진인들과 함께 세운 나라가 ‘금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호도 신라의 주요 성씨인 금(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 「세기(世紀)」에는 금나라 시조에 대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다."고 적었다. 당시 중원 왕조들은 한반도의 국가를 통칭하여 '고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니, 신라를 고려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국호인 '금(金)' 자체가 신라의 국성인 '김(金)'씨에서 유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완안부의 시조 함보가 신라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의 뿌리가 신라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송나라 사신으로 여진에 다녀왔던 홍호(洪皓)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여진의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여진족 내부에서도 그들의 지배층이 신라 계통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또한 발해가 멸망한 후 흩어졌던 여진족이 다시 뭉친 금나라의 건국 초기, 금나라를 세운 아구다는 발해인들에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渤海本同一家)"라고 선언했다. 그들 사이에 공유되는 혈통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주장이었다. 그러면 금나라도 발해처럼 우리 역사일까? (중국은 발해는 물론 고구려도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역사학자들은 발해와 금나라는 다르다고 한다.우선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명확한 '고구려의 계승자'다. 대조영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을 주도했으며, 스스로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고구려) 국왕'임을 명시했다. 또한 고구려 특유의 문화와 관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비록 피지배층인 말갈(여진)족이 다수였으나, 이들은 고구려 시대부터 한 울타리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이들이었으므로, 발해는 고구려의 강역과 정신을 계승한 한국사의 당당한 한 축(남북국 시대)으로 정의한다.하지만 금나라는 좀 다르다. 금은 신라의 혈통적 뿌리는 인정할 뿐, 국가 정체성은 '여진(완안부)'에 두었다. 이후 여진 고유의 풍습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중원(송)의 문화를 흡수해 가며, 한민족과 점점 분리되어갔다. 하지만 여진(말갈)족은 동이족이나 고조선 또는 부여 시대에도 크게 보면 모두 같은 민족이나 구성원이었고,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도 같은 백성들이었다. 따라서 생활문화와 언어가 같거나 아주 비슷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온돌이다. 삼국시대인 쪽두글 형태였는데, 이를 여진은 ‘항(炕)’이란 형태에서 ‘금’나라까지 이어졌다. 또한 활쏘기, 매사냥 등이 이어져 왔고, 언어의 유사성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통역 없이 뜻이 통했던 것처럼, 고려와 여진 사람들 간에도 뜻이 통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촌’ 정도의 민족적 동질성은 있었던 것 같다. 금나라 멸망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금(후금)은 금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이때의 후금은 여진의 언어와는 변화가 생기면서(조선의 말도 변화가 생겼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또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완전히 만주족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만주족을 원수로 생각하며, 약간이라도 남아 있을 지 모르던 민족적 우대감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그건 당시 조선인들 생각이고, 현대의 우리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바로 “여진(만주)족이 남이가?” 하는 생각이다.또한 같은 민족끼리도 싸우는 경우는 아주 많다. 하지만 멀리 동이족까지 넓히지 않더라도, 최소한 고조선 시대부턴 같거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한 나라의 백성이었다. 지금 중국엔 만주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만주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의 ‘남한산성’(사진)이란 영화다. 영화 남한산성에선 후금 사람들이 만주어를 쓴다. 중국에선 모든 사극에 현대의 중국어를 사용하는데, 한국영화에서 만주어를 듣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원나라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듯, 금과 청 역시 만약 중국 영토에서 분리된다면 그땐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즉 금과 청은 여진족의 역사이고, 여진족은 과거 한민족과 같은 백성이었다. 만약 고구려나 발해가 지속되었다면, 지금은 한 민족과 국민으로 융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졌던 여진(만주)족의 역사를 우리 또는 사촌의 역사로 연구하고, 국사 교과서에도 언급하면 어떨까 싶다.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대항할 겸...
금과 청은 누구의 역사인가?
금과 청은 누구의 역사인가? 얼마 전에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 출신’이라는 얘길 들었다.신라가 망할 즈음에 신라인(마의태자 또는 왕실 주요 인사라는 설도 있다)들이 만주로 건너가 여진인들과 함께 세운 나라가 ‘금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호도 신라의 주요 성씨인 금(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 「세기(世紀)」에는 금나라 시조에 대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다."고 적었다. 당시 중원 왕조들은 한반도의 국가를 통칭하여 '고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니, 신라를 고려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국호인 '금(金)' 자체가 신라의 국성인 '김(金)'씨에서 유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완안부의 시조 함보가 신라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의 뿌리가 신라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송나라 사신으로 여진에 다녀왔던 홍호(洪皓)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여진의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여진족 내부에서도 그들의 지배층이 신라 계통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또한 발해가 멸망한 후 흩어졌던 여진족이 다시 뭉친 금나라의 건국 초기, 금나라를 세운 아구다는 발해인들에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渤海本同一家)"라고 선언했다. 그들 사이에 공유되는 혈통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주장이었다. 그러면 금나라도 발해처럼 우리 역사일까? (중국은 발해는 물론 고구려도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역사학자들은 발해와 금나라는 다르다고 한다.우선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명확한 '고구려의 계승자'다. 대조영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을 주도했으며, 스스로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고구려) 국왕'임을 명시했다. 또한 고구려 특유의 문화와 관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비록 피지배층인 말갈(여진)족이 다수였으나, 이들은 고구려 시대부터 한 울타리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이들이었으므로, 발해는 고구려의 강역과 정신을 계승한 한국사의 당당한 한 축(남북국 시대)으로 정의한다.하지만 금나라는 좀 다르다. 금은 신라의 혈통적 뿌리는 인정할 뿐, 국가 정체성은 '여진(완안부)'에 두었다. 이후 여진 고유의 풍습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중원(송)의 문화를 흡수해 가며, 한민족과 점점 분리되어갔다. 하지만 여진(말갈)족은 동이족이나 고조선 또는 부여 시대에도 크게 보면 모두 같은 민족이나 구성원이었고,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도 같은 백성들이었다. 따라서 생활문화와 언어가 같거나 아주 비슷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온돌이다. 삼국시대인 쪽두글 형태였는데, 이를 여진은 ‘항(炕)’이란 형태에서 ‘금’나라까지 이어졌다. 또한 활쏘기, 매사냥 등이 이어져 왔고, 언어의 유사성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통역 없이 뜻이 통했던 것처럼, 고려와 여진 사람들 간에도 뜻이 통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촌’ 정도의 민족적 동질성은 있었던 것 같다. 금나라 멸망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금(후금)은 금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이때의 후금은 여진의 언어와는 변화가 생기면서(조선의 말도 변화가 생겼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또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완전히 만주족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만주족을 원수로 생각하며, 약간이라도 남아 있을 지 모르던 민족적 우대감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그건 당시 조선인들 생각이고, 현대의 우리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바로 “여진(만주)족이 남이가?” 하는 생각이다.또한 같은 민족끼리도 싸우는 경우는 아주 많다. 하지만 멀리 동이족까지 넓히지 않더라도, 최소한 고조선 시대부턴 같거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한 나라의 백성이었다. 지금 중국엔 만주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만주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의 ‘남한산성’(사진)이란 영화다. 영화 남한산성에선 후금 사람들이 만주어를 쓴다. 중국에선 모든 사극에 현대의 중국어를 사용하는데, 한국영화에서 만주어를 듣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원나라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듯, 금과 청 역시 만약 중국 영토에서 분리된다면 그땐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즉 금과 청은 여진족의 역사이고, 여진족은 과거 한민족과 같은 백성이었다. 만약 고구려나 발해가 지속되었다면, 지금은 한 민족과 국민으로 융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졌던 여진(만주)족의 역사를 우리 또는 사촌의 역사로 연구하고, 국사 교과서에도 언급하면 어떨까 싶다.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대항할 겸...
금과 청은 누구의 역사인가?
금과 청은 누구의 역사인가? 얼마 전에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 출신’이라는 얘길 들었다.신라가 망할 즈음에 신라인(마의태자 또는 왕실 주요 인사라는 설도 있다)들이 만주로 건너가 여진인들과 함께 세운 나라가 ‘금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국호도 신라의 주요 성씨인 금(金)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 「세기(世紀)」에는 금나라 시조에 대해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다."고 적었다. 당시 중원 왕조들은 한반도의 국가를 통칭하여 '고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니, 신라를 고려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청나라 건륭제 때 편찬된 『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국호인 '금(金)' 자체가 신라의 국성인 '김(金)'씨에서 유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완안부의 시조 함보가 신라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며,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의 뿌리가 신라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송나라 사신으로 여진에 다녀왔던 홍호(洪皓)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여진의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 여진족 내부에서도 그들의 지배층이 신라 계통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시사한다.또한 발해가 멸망한 후 흩어졌던 여진족이 다시 뭉친 금나라의 건국 초기, 금나라를 세운 아구다는 발해인들에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女眞渤海本同一家)"라고 선언했다. 그들 사이에 공유되는 혈통적 공감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주장이었다. 그러면 금나라도 발해처럼 우리 역사일까? (중국은 발해는 물론 고구려도 그들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역사학자들은 발해와 금나라는 다르다고 한다.우선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명확한 '고구려의 계승자'다. 대조영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을 주도했으며, 스스로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고구려) 국왕'임을 명시했다. 또한 고구려 특유의 문화와 관제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비록 피지배층인 말갈(여진)족이 다수였으나, 이들은 고구려 시대부터 한 울타리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이들이었으므로, 발해는 고구려의 강역과 정신을 계승한 한국사의 당당한 한 축(남북국 시대)으로 정의한다.하지만 금나라는 좀 다르다. 금은 신라의 혈통적 뿌리는 인정할 뿐, 국가 정체성은 '여진(완안부)'에 두었다. 이후 여진 고유의 풍습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중원(송)의 문화를 흡수해 가며, 한민족과 점점 분리되어갔다. 하지만 여진(말갈)족은 동이족이나 고조선 또는 부여 시대에도 크게 보면 모두 같은 민족이나 구성원이었고, 고구려와 발해 시대에도 같은 백성들이었다. 따라서 생활문화와 언어가 같거나 아주 비슷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온돌이다. 삼국시대인 쪽두글 형태였는데, 이를 여진은 ‘항(炕)’이란 형태에서 ‘금’나라까지 이어졌다. 또한 활쏘기, 매사냥 등이 이어져 왔고, 언어의 유사성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통역 없이 뜻이 통했던 것처럼, 고려와 여진 사람들 간에도 뜻이 통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촌’ 정도의 민족적 동질성은 있었던 것 같다. 금나라 멸망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금(후금)은 금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이때의 후금은 여진의 언어와는 변화가 생기면서(조선의 말도 변화가 생겼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되었다.또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완전히 만주족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만주족을 원수로 생각하며, 약간이라도 남아 있을 지 모르던 민족적 우대감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그건 당시 조선인들 생각이고, 현대의 우리는 생각이 다를 수 있다.바로 “여진(만주)족이 남이가?” 하는 생각이다.또한 같은 민족끼리도 싸우는 경우는 아주 많다. 하지만 멀리 동이족까지 넓히지 않더라도, 최소한 고조선 시대부턴 같거나 비슷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한 나라의 백성이었다. 지금 중국엔 만주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만주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한국의 ‘남한산성’(사진)이란 영화다. 영화 남한산성에선 후금 사람들이 만주어를 쓴다. 중국에선 모든 사극에 현대의 중국어를 사용하는데, 한국영화에서 만주어를 듣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원나라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듯, 금과 청 역시 만약 중국 영토에서 분리된다면 그땐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즉 금과 청은 여진족의 역사이고, 여진족은 과거 한민족과 같은 백성이었다. 만약 고구려나 발해가 지속되었다면, 지금은 한 민족과 국민으로 융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졌던 여진(만주)족의 역사를 우리 또는 사촌의 역사로 연구하고, 국사 교과서에도 언급하면 어떨까 싶다.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대항할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