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쌀)의 민족
밥(쌀)의 민족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 중 하나가 “밥 한번 먹자”다. 유래나 이유가 어떻든, 그만큼 밥에 진심이라는 얘기다. 오죽하면 “모든 힘은 밥심에서 나온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러면 밥의 원료인 쌀(벼)을 가장 먼저 재배한 곳은 지금의 어디일까?바로바로..대한민국이다.(필자도 이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과거엔 ‘벼농사는 중국 장강 유역에서 시작했다’가 정설처럼 되어 있었는데, 1994년 청주 소로리 공사 현장에서 볍씨가 130여 개 발견되면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사진)이 볍씨들을 서울대와 미국 애리조나대 등 세계 최고 기관에 보내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최대 15,000년 ~ 17,0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중국의 기록보다 무려 3,000년 이상 앞선 전 세계 최고(最古) 기록이다. 특히 단순히 오래된 야생 벼가 아니라, 인간이 직접 기르는 '야생에서 재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영국 BBC가 이를 긴급 보도했으며, 세계적인 고고학자 콜린 램프류(Colin Renfrew) 교수의 유명 고고학 교과서(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에도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공식 등재되었다.즉 한국이 전 세계 쌀 문화와 벼농사 기원의 시조일 수 있음을 증명한 발견이 바로 ‘소로리 볍씨’다. 이를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 마을인 청주 소로리에 선사박물관이 들어설 계획이다. 벼농사의 원조답게,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꾸준히 벼농사 즉 쌀농사에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의 쌀 품종 개발이 무섭게 성장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고시히카리'와 ‘아키바레(추청)’ 같은 명품 품종을 개발했고, 한국 식탁도 이들이 오랫동안 점령했다. 1970년대 한국은 양을 많이 수확하기 위해 대량 생산용 '통일벼'를 대대적으로 심었다. 하지만 통일벼는 푸석하고 찰기가 없어 맛이 떨어졌다. 이때 소득이 늘어난 대도시 소비자들이 "돈을 더 주더라도 맛있는 밥을 먹겠다"며 찾기 시작한 게 바로 일본쌀이었다. 특히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 등에서 ‘아키바레’를 많이 재배하면서, "임금님표 이천쌀 = 아키바레 = 최고급 쌀"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지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한국은 ‘밥(쌀)의 민족’답게 판도를 뒤집었다.우선 품종 개량부터 시작했다. 정부와 농촌진흥청은 품종 개량을 꾸준히 진행해, 2020년대를 기점으로 경기 이천, 여주 등 전국의 유명 쌀 주산지에서 아키바레와 고시히카리가 거의 퇴출당했다.또 하나의 사건은 압력밥솥 개발이다. 고압, 초고압, 유도가열(IH) 등 온갖 첨단 기술을 동원해 "가마솥에서 갓 지은 듯한 윤기 나는 찰진 밥맛"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밥솥 기술은 우리나라가 독보적이고, 특히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사가는 주요 품목이기도 하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밥(쌀, 벼)는 늘 한국이 세계를 선도해 왔다.그래서 지금도 한국인은 ‘밥심’이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낄끼빠빠
낄끼빠빠 최근 유튜브 쇼츠에서 이런 콘텐츠를 보게 되었다. 한 여성 사장님이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한 남성 손님이 매일 저녁마다 똑같은 딸기초코케익을 사 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그 손님이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사장은 무심코 “딸기초코케익이 품절인데, 다른 거 드리면 안될까요?”라고 말하자, 해당 손님은 얼굴이 굳으며 추천한 케익을 사 갔다. 그런데 그 다음부턴 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괜히 아는 척 했다가, 단골 손님만 놓쳐 버렸다. 이를 제미나이에서 찾아보니 후면 공간 (Back Stage)과 전면 공간 (Front Stage)이라는 이론이 있다고 한다. 후면 공간은 인간이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긴장을 풀고 편하게 쉴 수 있는 '무대 뒤' 공간이고, 전면 공간은 사회적 역할(직장인, 예의 바른 성인 등)을 수행하며 가면을 써야 하는 '무대 위' 공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골 손님에게 카페는 자신을 알아보지 않고 편하고 긴장을 풀 수 있는 ‘후면 공간’이었지만,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하는 순간 손님에게 카페는 '전면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앞으로는 올 때마다 나를 알아본다는 '사회적 긴장감'이 발생하면서, 그 공간이 불편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란다. 생각해보니 필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한 25년 전 쯤, 당일 신장개업을 한 작은 술집을 갔었다. 필자 또래의 사장 부부가 운영해서인지, 좋게 말을 걸어 줬다. 두세 번쯤 갔었나? 어느 날 자리 잡고 앉았는데, 갑자기 남자 사장이 테이블에 앉아서 필자에게 “재탁씨”라며 친한 척하는 것이었다. 순간 너무 기분이 상했다. “내가 지 친군가? 좀 잘 대해줬더니, 졸지에 재탁씨라네?” 우리나라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건 아주 친한 사람들끼리나 하는 행위다. 대개 직책이나 직함 또는 그냥 ‘사장님’이라고 통칭한다.이렇게 필자는 '돈을 지불하고 정당한 서비스를 받는 손님'으로 그 자리에 갔는데, 주인이 "OO 씨"라고 부르는 순간 손님이 아니라 '사적 친분 관계'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날로 발을 끊었다. 더 흔한 경우도 있다.어느 식당 같은 곳에 가서 대화를 하는데, 서빙하는 분이 끼어들어 말을 가로채는 경우다. “그럴 땐 ** 해야 돼요”라거나, “나도 거기 가 봤어요” 하는 식이다. 무슨 말을 못 하겠다. 심지어 “아주머니 여기 앉으세요, 같이 얘기하게’라고 얘기할뻔했다.나아가 일행에게 “전에 가족끼리 오셨죠?”라며 묻지도 않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쯤되면 프라이버시 침해다. 종업원이 말 한마디 친한 척 잘못했다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런 얘길 할까?손님이 식당의 특정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는 순간, 그 테이블과 주변 공간은 손님의 '사적 영역'이다. 서빙 직원이 대화에 끼어들거나 주인이 과도하게 친한 척 하는 것은 '손님의 영역을 무단 침범하는 행위'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가끔 착각하는 게 있다. ‘친한 단골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거나, ‘친한 척 또는 말을 걸어주면 손님이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이다.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정중한 무관심 (Civil Inattention)’이란 말이 있다고 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제시한 개념이다. '상대방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해 고의로 시선을 거두거나 모르는 척해주는 배려'라고 한다. 물론 자신을 알아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점포는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이런 경우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얘기이고, 아주 오래된 가게의 경우다. 요즘 “낄끼빠빠“라는 말이 유행한다.”낄 때 즉 껴야 할 땐 과감히 끼어들고, 빠져야 할 땐, 확실히 빠지라“는 방송 연예 프로그램용 은어다.마찬가지로 손님의 성향에 따라 아는 척하는 게 좋은지 모르는 척 하는 게 좋은지, 잘 판단해야 한다. 그 전까지는 알아도 모르는 척해주는 게 현대사회의 기본 예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고려시대의 목욕 문화
고려시대의 목욕 문화 사람들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판단하는 오류를 자주 저지른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과거에서 현대로 올수록, 문화가 발전해왔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것이다. 즉 삼국시대보다 고려시대가,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문화적 측면에서 발전해 왔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깨는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올라온 내용때문이다.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려도경> 얘기다.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문명국’ 송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지식인’ 서긍(徐兢)이 남긴 여행기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사高麗圖經)》 즉 고려도경에는 고려를 경험하고 놀라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목욕’ 문화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은 청결함을 중시하여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목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여름철에는 남녀가 유별하지 않고 시냇가에서 함께 목욕을 하기도 했는데, 서긍은 이를 보고 다소 놀라워하며 "중국 사람들은 때가 많고 더럽다며 비웃는다"라고 적었다. 서긍의 기록은 당시 고려인들이 송나라 사람들과 비교해도 훨씬 더 깨끗하고 위생적인 생활을 영위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다. 당시 고려인들은 위생을 교양의 척도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불교적 영향을 받아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는 사상이 일상에 깊게 뿌리 박힌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목욕 외에도 손을 자주 씻는 습관이 있었는데, 특히 식사 전이나 외출 후 등 수시로 손을 씻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면 여름엔 그렇다 쳐도, 겨울에도 목욕을 자주 했을까?그래서 찾아봤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기에 사찰의 역할이 컸는데, 사찰은 단순히 종교 시설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문화적 중심지였다. 사찰에는 대형 가마솥에 물을 데울 수 있는 시설이 있었고, 신도나 마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욕실(浴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욕을 시켜주는 것을 큰 공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겨울에도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었다.또한 상류층이나 부유한 민가에서는 집안에서 목욕을 해결했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욕조에 물을 데워 붓는 방식으로 전신 목욕을 했다. 고려의 왕들과 귀족들은 겨울철에 온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일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이렇게 고려시대엔 겨울에도 아침에 일어나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오히려 거꾸로 갔다.유교 국가인 조선은 '신체노출'을 극도로 꺼려, 옷을 다 벗고 물속에 들어가는 전신 목욕보다는 세수, 발 씻기, 머리 감기 등 부분적으로 씻었다. 집안에 별도의 목욕탕이 없었기 때문에, 방 안에서 대야에 물을 받아 수건에 적셔 몸을 닦아내는 '탕건(盪巾)' 방식으로 씼었다.여름에도 물가에서 발만 담그는 '탁족(濯足)'이 양반들의 선비 정신을 기리는 풍류라 생각했다.임금조차 물에 몸을 담그기보다 궁녀들이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왕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드리는 방식이었다. 온천은 치료 목적으로만 행했다.그러니 조선사람들은 얼마나 더러웠을까? 조선 임금들은 연이어 피부병이나 종기로 고생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 인골(人骨) 분석이나 고병리학(Paleopathology)을 통한 과거의 질병을 연구 결과도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하면 영양 상태나 만성 질환을 알 수 있는데, 현재까지의 연구로는 고려인들이 조선인들에 비해 영양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는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영양 상태가 좋으면 피부 면역력도 높기 마련이다. 어쨌든 고려시대 사람들에 비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훨씬 더럽고 피부병이 더 심했을 것 같다. 즉 알고 보니 고려시대 사람들이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더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필자의 막연한 편견은 가차없이 깨져버렸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세종 시대 과학은 세계 최고였다!
세종 시대 과학은 세계 최고였다! 조선 시대에 일식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왕이 정치를 잘못해서 하늘이 내리는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일식이 예보되면 왕은 소복을 입고 궁궐 마당에서 해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구식례(救食禮)라는 중대한 국가 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러던 세종 4년(1422년) 1월 1일(음력), 신하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 뜻깊은 날에 일식이 예보되었다. 세종은 예법에 따라 소복을 갈아입고 마당에 엎드려 경건하게 일식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보된 시간이 되어도 해가 멀쩡했다. 결국 일식은 천문 기관인 서운관이 예보한 시간보다 1각(약 14.4분)이 늦게 시작되었다. 임금이 차가운 마당에서 옷을 갖춰 입고 15분 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서 있는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왕의 권위에 금이 간 이 사건으로 인해 일식 예보를 담당했던 관리 이천봉은 태형(곤장)을 맞았다. 그러면 왜 14.4분이 틀렸을까? (필자는 그 정도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이 오차는 천문 관리의 단순한 계산 실수가 아니라, 당시 조선이 중국 명나라의 달력인 '대통력'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명나라의 달력은 중국의 수도(당시 남경/북경)를 기준으로 계산된 것이지만, 한양(서울)은 중국보다 동쪽에 치우쳐 있어 천문 현상이 발생하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세종 14년에도 일식 오보 사건이 한 번 더 발생한다. 그렇지 않아도 백성들의 농사가 최우선이었던 시절이라, 세종대왕은 우리에게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역법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달력을 만드는 것은 ‘자주 독립’으로 비춰지며, 중국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위험한 정치적 행위였다. 하지만 세종은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1444년 이순지·김담 등의 천재 과학자들과 함께 마침내 조선 고유의 역법서인 《칠정산》을 완성했다.실제로 《칠정산》을 완성한 후인 세종 29년(1447년) 음력 8월 1일에 일식이 또 있었는데, 이때는 일식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을 단 1분 내외의 오차로 완벽하게 예측해 냈다.(망원경도 없던 시절에 일식을 도대체 어떻게 미리 예측했을까?) 당시 전 세계에서 자기 나라 수도를 기준으로 해, 달, 5개 행성(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의 움직임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던 나라는 조선, 중국, 아라비아 세 곳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세종대왕이 신하를 시켜 ‘일 년의 길이’를 쟀다. "1년은 365.2425일"이라고 계산했다. 현대 과학으로 정한 지금의 일 년과 비교하면, 불과 0.0004일 차이라고 한다. 당시 최고의 정확성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칠정산 내외편’이 대충 천문학과 관련되었다고만 배웠지만, 이렇게 대단한 업적인 줄은 몰랐다.《칠정산 내편》은 기존 동양의 역법을 철저히 한양의 위도와 경도에 맞춰 재계산했다. 반면 《칠정산 외편》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던 아라비아의 천문학을 도입해, 고등 기하학과 삼각함수(구면삼각법)로 행성의 궤도를 풀어냈다. 헐~ 말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워 진다. 정확한 수식을 만들려면 정밀한 데이터가 필수다. 경복궁에 세워진 거대 천문대 '간의대'에서는 15세기형 조준경이라 할 수 있는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를 통해 매일 밤 별들의 좌표를 분(?) 단위로 측정했다. 또한 거대한 자의 원리를 이용한 규표(圭表)로 태양 그림자의 길이를 밀리미터(?) 단위로 계측하여 24절기를 정확히 잡아냈다.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 자격루는 관측 데이터에 오차 없는 표준시 역할을 했다. 15세기 유럽이 달력의 오차를 잡지 못해 쩔쩔매다 1582년이 되어서야 겨우 개정한 '그레고리력'의 핵심 수치를, 조선은 이미 138년 전인 1444년에 완성해 사용하고 있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업적이다.우리 과학이 유럽과 중국을 훨씬 앞섰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하지만 이랬던 조선이 나중에 갈수록 망가졌다는데 대해 한심함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
남미 교과서에서의 한국
남미 교과서에서의 한국 필자가 어릴 적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다. 김찬삼 교수는 1958년부터 시작해 1970년대 말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세계를 여행한 한국 최초의 전문 여행가다. 그의 세계여행기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발간되었는데, 갈수록 두껍고 화려하고(흑백에서 컬러로 발전) 고급스러워졌다. (사진) 인기도 많아 웬만한 집에도 꽂혀 있을 정도였다. 당시엔 해외 여행을 꿈도 못 꾸고 외국에 대한 자료나 정보도 크게 부족했던 시절이라, <김찬삼 세계여행>은 어린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외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김찬삼 교수가 해외여행을 시작한 1960년대 전후만 해도,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돈 없는 여행자의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김찬삼 교수가 생소했던 남미를 처음 방문한 시기가 1961년이다. 당시 에콰도르나 페루, 칠레의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는 나라 자체를 몰랐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스파이 아니냐", "밀항자 아니냐"며 몇 시간씩 독방에 갇혀 취조당했다. 심지어 한국 여권을 처음 본 현지 관리들이 여권을 가짜라고 무시하며 집어던지거나, 입국을 거절해 국경 근처 뙤약볕 아래서 며칠씩 노숙하며 사정해야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에콰도르나 페루의 도심을 걸을 때면 현지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몰려와 동양인을 비하하며 놀리거나, 심지어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칠레 등지에서 밤에 너무 춥고 배가 고파 민가의 문을 두드리며 "마당에서 잠만 자게 해달라", "물을 좀 달라"고 청했을 때,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문을 쾅 닫아버리거나 개를 풀어 쫓아내는 서러운 홀대를 수없이 겪었다. 그런데 지금의 남미는 대한민국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한국인을 너무나 사랑하게 바뀌었다.심지어 에콰도르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직지)'이 대대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도합 14개 교과서에 한국의 발전상이 상세히 담겨 있다고 한다. 특히 직지에 대해선 무려 12페이지에 걸쳐 아주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교과서에는 직지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 세계 최초의 서적, 2001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독일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약 80년 앞서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를 발명했다는 등의 구체적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보다 더 자세하다!)이외에도 9학년 사회 교과서에는 한국이 1945년 식민지배 종식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엄청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스토리가 담겨 있다. 또한 세계 수소차 판매량 1위(현대자동차), 전국을 2시간대로 연결하는 고속열차(KTX), 5G 스마트폰의 대중화(삼성전자), KAIST의 인공지능 로봇 연구 등이 과학·물리 교과서에 예시로 쓰인다. 나아가 한국의 영화나 유명 생존 게임(배틀그라운드 등)을 통한 문화적 영향력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사실 남미에선 정도의 차이일 뿐, 공통적 현상이다.칠레는 남미에서 가장 먼저 한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한 국가인 만큼, 교과서 속 한국은 '경제적 파트너'이자 '선진 도시'로 등장한다. 특히 칠레 지리 교과서 내 세계지도에서 '일본해' 단독 표기 대신 '동해(Mar del Este)'가 단독 또는 병기하는 성과를 거뒀다.페루의 교과서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자원이 전혀 없는 나라가 오직 '인적 자원(교육)'과 '수출 주도형 산업'만으로 어떻게 글로벌 IT·자동차 강국이 되었는지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텍스트와 도표가 실려 있다. 이렇게 남미의 교육계에서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교육과 기술 발전을 통해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을 '가장 이상적인 롤모델'로 보고 있다. 김찬삼 교수가 홀대받으며 눈물 흘리던 시기로부터 6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2003년 작고)감격스럽다.대한민국 만세다. <묻는다일보 발행인 배재탁 ybjy0906@naver.com>